맑고 화창한 날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야 성공적인 여행이라는 소리가 지겹다. 그런 날 가봐야 뙤약볕 아래서 땀만 흘리고 사람 뒤통수만 구경하다 오기 십상이다. 흰 털의 양들은 강한 햇빛 아래서 꾀죄죄한 회색빛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축축하게 안개가 내려앉거나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 이곳의 진짜 매력을 보기 좋은 날이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초지와 양들의 실루엣은 뻔한 풍경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묵직한 운치를 풍긴다.
흐린 날에는 양들의 움직임도 한결 차분하다. 더위에 약한 동물이라 해가 쨍쨍하면 그늘 밑에 뭉쳐서 움직이지도 않는데, 날이 흐리면 오히려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관찰하기 쉽다. 먹이 주기 체험 공간도 훨씬 한산해서 여유롭게 건초를 줄 수 있다. 바구니를 들고 다가가면 순한 눈망울로 다가오는데, 그때 가만히 녀석들의 거친 숨소리와 입 모양을 관찰하는 고요함이 꽤 괜찮다. 소음 대신 축축한 흙냄새와 풀 내음이 스치는 경험은 흐린 날의 특권이다.
산길 산책로는 흐린 날에 더 미끄러우니 구두나 슬리퍼 같은 한심한 차림새는 애초에 꿈도 꾸지 마라. 발목을 잡아주는 운동화나 방수가 되는 신발을 신어야 진흙탕에서 미끄러져 체면 구기는 일을 막는다. 우산보다는 품이 넓은 우의를 입는 것이 양들에게 건초를 줄 때 두 손이 자유로워 훨씬 편하다. 안개가 심하면 정상 부근의 시야가 가려지니 굳이 꼭대기까지 올라가겠다고 고집 피우지 말고 중간 지점의 축사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현명하다.
남들이 다 가는 맑은 날을 피해 궂은날을 골라 가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막상 안개 자욱한 언덕에 서보면 알게 된다. 다녀와서 젖은 몸을 털어내고 씻을 때 밀려오는 뻐근한 만족감은 흔한 나들이와는 격이 다르다. 혹시라도 빗길을 걷느라 축축해진 발을 그냥 방치했다가 감기 걸려 고생하지 말고, 가방 구석에 마른 수건 한 장이랑 여분의 양말 정도는 미리 찔러 넣어 두고 출발하길 바란다. 쓸데없이 춥게 다니지 말고 꼭 챙겨 가라.